제1화, "20대의 백의의 천사들,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다"



사진 장순휘 박사 제공
60년전 1966년 1월 31일은 대한간호협회의 역사에서 잊혀질 수 없는 날이다. 파독 간호사 제1진 128명이 오색찬란한 한복을 입고 이역만리 독일의 푸랑크후르트공항에 도착했다. 가족을 위해, 조국을 위해,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던 대한의 딸들이었다. 이후 1976년까지 한국의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벌어들인 마르크화로 한국의 산업화에 마중물이 되었다. 파독간호사들의 성실하고 근면하며 검소한 근무자세와 독일환자에 대한 정과 사랑으로 ‘코리안 엔젤’이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파독간호사들이 간 길은 독일의 일자리였지만, 돌아온 길에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가 있었다.
1966년은 시간적으로 어언 60년전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6.25전쟁의 정전으로 총성은 멈췄지만 전쟁의 상흔으로 세계에서 최빈국의 하나였다. 6·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13년이 지난 1966년은 5.16 이후 국가재건의 길에 박차를 가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무리하는 시기로 국가산업화의 기반을 닦던 역동적인 시기였다. 특히 1965년 10월 4일 고 강재구소령의 부하를 대신하여 수류탄을 덮친 희생사의 추모열기로 1966년 2월 23일 육사에서는 동상제막식이 있었다. 1960년대 북한의 대남도발은 직접 침투 988건과 국지지상도발 298건을 포함하여 총 1,336건으로 최대 도발건수를 기록했던 매우 불안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며 건설한다’는 구호하에 전 국민들은 ‘반공정신 무장’과 ‘가난과의 싸움’으로 열심히 살았던 시기로 기억된다. 그때까지도 미국의 식량원조와 물자원조 등 원조없이 생계유지가 불가했던 시기라서 잘 살아보려는 열망은 국민적인 분위기였다.
1963년 12월 22일은 파독 광부가 뒤셀도르프 공항에 제1진 1차 123명이 도착한 날이다. 이어서 12월 27일 제1진 2차 124명이 도착하여 총247명이 탄광회사에 분산배치되었다. 국가재건시대에 한국 경제의 주춧돌을 쌓았던 역사적인 첫 한국인 광부의 파독역사는 1977년 10월 26일 제2차 47진 138명에 이르기까지 12년간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1966년 1월 31일 파독 간호사 제1진 128명이 프랑크후르트 공항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이주노동사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간호복을 입은 20대의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와 가난한 조국의 발전을 위해 겁도없이 머나먼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다. 1966년은 수출진흥정책이 강화되었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발족 및 한미 행정협정(SOFA)가 조인되었다. 한편으로는 남북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DMZ에서 북한군의 무력도발이 증가되는 시기였다. 베트남전에도 국군이 추가로 파병부대를 투입하는 시기로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에 걸쳐 한미동맹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국가안보기조 하에 경제발전에 전국민이 매진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 일본 JAL기를 타고 프랑크후르트 공항에 첫 도착한 128명의 간호사들은 오색찬란한 한복 차림으로 트랩으로 내려서 독일인들에게 매우 인상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사실 가난한 국가적 상황에서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간다는 것 자체가 희귀한 일상이라서 자랑거리기도 했다. 당시 파독간호사를 모집선발하여 파견하는 여성의 해외노동수출이라는 차원에서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사로 다뤄졌다. 동아일보(1966년 9월 1일) <해외로 꿈 부픈 여성>의 기사에서 여성들의 해외취업 열기를 보도했으나 11월 17일 <모자라는 간호원>이라는 기획기사에서 서울대병원 등에서 간호인력의 해외 유출로 인한 인력부족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던 점에서 국내환자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세상사라는 것이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다. 가난한 조국 대한민국의 여성들에게 독일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나라였다. 높은 임금, 새로운 도전, 가족을 부양할 기회가 독일을 향한 선택을 하게했다. 그러나 김포공항을 떠난 그 젊은 여성들이 훗날 대한민국 산업화의 마중물로 역사적인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당시 판단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기대와 우려를 딛고 파독광부와 파독간호사가 산업전사로서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헌신을 했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오늘날 격찬하기에 조금도 망설일 이유가 없다.
한국 간호사들의 파독의 역사는 크게 3단계로 구분해볼 수 있다. 제1단계는 1966년 이전단계로써 종교단체 등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간호사들이 취업되었다. 제2단계는 민간인 차원에서 대규모 파독이 시작됐다. 그리고 1969년부터 1976년까지는 정부차원에서 대규모 파견이 이루어진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처럼 1960년대 초 민간 차원에서 시작된 해외취업의 효시인 파독간호사는 파독광부와 함께 한국의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발전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1966년부터 집단으로 독일 취업이 가능했으며, 1969년부터는 정부의 인력수출정책과 맞물려 <한독간호협정>에 체결되어 정부차원으로 전환하여 1976년까지 이어졌다.
우리 간호사의 독일 취업파견은 여성전문인력의 최초의 집단 해외취업으로 이역만리 독일과 한국 사이의 외교증진에도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그리고 간호사들의 독일 취업은 한국여성사에 있어서도 국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간호사들이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독일 마르크화를 벌어서 외화부족으로 경제적 여력이 없었던 가난했던 조국을 위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간호사들의 가정도 가난을 벗고 윤택한 경제적 안정을 획득했다. 결국 간호사들이 젊은 날 흘린 땀과 눈물이 가정과 나라를 살려낸 자랑스런 도전이 되었다. 특별히 독일사회에서 한국 간호사들이 신뢰와 존중과 사랑을 받은 데에는 한국인 특유의 정과 배려의 문화를 통해 독일인 의료진과 환자들의 감동이 전해지면서 독일사회에서 ‘코리안 엔젤’로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인정은 가난한 후진국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변화와 한국의 문화예술에 대한 독일사회의 관심과 연구를 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독일 신문보도의 공통적인 내용에는 “한국 젊은 여성의 친절과 상냥한 미소”는 항상 빠지지않고 들어있었다. 한 독일인 간호원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한국 간호원에 대한 경이로운 감동을 말하고 있다. “우리 또한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지만 가끔씩 힘들 때는 스트레스와 화를 다스리기 힘들다. 그러나 한국 간호원들은 늘 친절하고 웃는 얼굴이다. 아마 이 사람들은 감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고 격찬을 했다. 특히 독일인 환자들이 비록 독일어가 서툴러서 실수도 하지만 진심으로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다시 최선을 다하는 진정성에 다른 외국간호원보다도 한국 간호원의 인기와 선호도가 대단했다고 한다. 한국인에게는 인성적으로 인정이 많은 민족성이 있기 때문에 환자들의 각종 불만과 불평을 친절하게 듣고 해결해주고자 동병상린(同病相燐)의 공감으로 보살펴준 것이 감동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한국 간호원이 근무했던 ‘홱스트(Hoechst)’병원에서는 한국인 직원을 위한 메뉴를 준비해서 식사를 하게했다고 한다. 독일요리사는 인터뷰에서 “한국 간호원들이 우리에게 베푸는 친절과 배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니 참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후 1년이 지난 홱스트병원에서는 ‘한국의 밤’을 개최하여 배려했으며, 1967년 4월 18일자 프랑크후르트 알게마인네 짜이퉁(FAZ)는 행사에서 입은 한복에 관한 설명으로 지면의 거의 절반을 할애했을 정도로 한국 간호사들에 대해 호평을 했다. 우리 젊은 간호원들의 인정많고 인내심이 강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병원의 업무수행자세는 알고보면 가정교육에서 그 뿌리를 찾는 것이 맞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그 어려운 가정생활에서 가족간에 배고프고 힘들고 불편했던 시간을 밥을 나눠먹고 서로 돕고 참으면서 가족 간 사랑으로 이겨냈던 배경에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희생하며 가족을 돌봐주시던 어머니의 사랑을 뼈에 사무치도록 배웠던 간호사들의 어린 시절에서 그와 같은 ‘코리안 엔젤’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66년 8월 14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서독 파견간호원 모집공고>에는 자격조건으로 20~30세 미혼 또는 독신녀로 간호원 자격소지자, 계약기간 3년에 월급 627마르크(157달러)라고 공고했다. 당시 환율은 1달러=272원 수준이었다는 한국은행 자료를 바탕으로 157달러는 약42,700원이다. 한국내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자료에 따른 차이가 있지만 약 7,500원으로 추정된다. 사무직의 경우 초임이 대략 5,000~7,000원 수준으로 본다면 파독간호사는 약 5.7배의 임금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1인당 국민소득이 약82달러에 불과하여 월급 157달러는 놀라운 임금수준이었다. 고국에 송금한 월급은 곧 대한민국의 대외신인도와 경제발전의 마중물이 됐고, 한국 노동자들이 세계적으로 우수한 인력으로 인정을 받아서 해외로 진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특히 독일에 진출한 간호사들은 가장 우수한 실력과 성실한 근무로 독일사회의 신화로 남아있다.
우리 간호사들은 근무가 끝나면 독일어를 공부하는데 시간을 투자했다. 기숙사에서 단어를 열심히 외운 뒤 다음날 병원에서 활용하였고, 스터디그룹도 만들어 공부하거나 폭크스호흐슐레(국민대학)을 다니기도 했다. 말이 트이자 독일문화와 풍경이 눈에 들어왔고, 비로소 독일사회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적응하려는 타국에서의 노력과 함게 가족과 고향, 조국 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향수병을 앓기도 했다. 어린 시절 놀이하던 고무줄과 공기놀이를 동료간호사들과 하면서 수다를 떨기도했고, 주말에는 한복을 꺼내 입고 시내도 다니며 한국인을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간호사들은 심한 향수병으로 힘들어했다고 한다. 20대라는 나이가 고향에서 부모형제들과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바쁜 나이인데 이역만리 독일에 와서 3교대로 밀려오는 간호사일을 해야했던 일상은 결코 쉬운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사랑과 나라사랑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향한 대한민국 간호사라는 자긍심과 명예심으로 고단했던 시절을 다 이겨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인생성공이 분명하다. 파독간호사 제60주년 기념은 간호사분들만의 60주년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민과 함께 축하하는 축제가 되어야한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파독간호사분들게 더 늦기 전에 보은(報恩)을 해야하는 시간이다.
60년전 1966년 1월 31일은 대한간호협회의 역사에서 잊혀질 수 없는 날이다. 파독 간호사 제1진 128명이 오색찬란한 한복을 입고 이역만리 독일의 푸랑크후르트공항에 도착했다. 가족을 위해, 조국을 위해,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던 대한의 딸들이었다. 이후 1976년까지 한국의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벌어들인 마르크화로 한국의 산업화에 마중물이 되었다. 파독간호사들의 성실하고 근면하며 검소한 근무자세와 독일환자에 대한 정과 사랑으로 ‘코리안 엔젤’이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파독간호사들이 간 길은 독일의 일자리였지만, 돌아온 길에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가 있었다.
출처 : 저작권자 © NGO Press | 엔지오프레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장순휘 편집위원 jjsh7864@daum.net
사진 장순휘 박사 제공
60년전 1966년 1월 31일은 대한간호협회의 역사에서 잊혀질 수 없는 날이다. 파독 간호사 제1진 128명이 오색찬란한 한복을 입고 이역만리 독일의 푸랑크후르트공항에 도착했다. 가족을 위해, 조국을 위해,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던 대한의 딸들이었다. 이후 1976년까지 한국의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벌어들인 마르크화로 한국의 산업화에 마중물이 되었다. 파독간호사들의 성실하고 근면하며 검소한 근무자세와 독일환자에 대한 정과 사랑으로 ‘코리안 엔젤’이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파독간호사들이 간 길은 독일의 일자리였지만, 돌아온 길에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가 있었다.
1966년은 시간적으로 어언 60년전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6.25전쟁의 정전으로 총성은 멈췄지만 전쟁의 상흔으로 세계에서 최빈국의 하나였다. 6·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13년이 지난 1966년은 5.16 이후 국가재건의 길에 박차를 가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무리하는 시기로 국가산업화의 기반을 닦던 역동적인 시기였다. 특히 1965년 10월 4일 고 강재구소령의 부하를 대신하여 수류탄을 덮친 희생사의 추모열기로 1966년 2월 23일 육사에서는 동상제막식이 있었다. 1960년대 북한의 대남도발은 직접 침투 988건과 국지지상도발 298건을 포함하여 총 1,336건으로 최대 도발건수를 기록했던 매우 불안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며 건설한다’는 구호하에 전 국민들은 ‘반공정신 무장’과 ‘가난과의 싸움’으로 열심히 살았던 시기로 기억된다. 그때까지도 미국의 식량원조와 물자원조 등 원조없이 생계유지가 불가했던 시기라서 잘 살아보려는 열망은 국민적인 분위기였다.
1963년 12월 22일은 파독 광부가 뒤셀도르프 공항에 제1진 1차 123명이 도착한 날이다. 이어서 12월 27일 제1진 2차 124명이 도착하여 총247명이 탄광회사에 분산배치되었다. 국가재건시대에 한국 경제의 주춧돌을 쌓았던 역사적인 첫 한국인 광부의 파독역사는 1977년 10월 26일 제2차 47진 138명에 이르기까지 12년간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1966년 1월 31일 파독 간호사 제1진 128명이 프랑크후르트 공항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이주노동사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간호복을 입은 20대의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와 가난한 조국의 발전을 위해 겁도없이 머나먼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다. 1966년은 수출진흥정책이 강화되었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발족 및 한미 행정협정(SOFA)가 조인되었다. 한편으로는 남북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DMZ에서 북한군의 무력도발이 증가되는 시기였다. 베트남전에도 국군이 추가로 파병부대를 투입하는 시기로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에 걸쳐 한미동맹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국가안보기조 하에 경제발전에 전국민이 매진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 일본 JAL기를 타고 프랑크후르트 공항에 첫 도착한 128명의 간호사들은 오색찬란한 한복 차림으로 트랩으로 내려서 독일인들에게 매우 인상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사실 가난한 국가적 상황에서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간다는 것 자체가 희귀한 일상이라서 자랑거리기도 했다. 당시 파독간호사를 모집선발하여 파견하는 여성의 해외노동수출이라는 차원에서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사로 다뤄졌다. 동아일보(1966년 9월 1일) <해외로 꿈 부픈 여성>의 기사에서 여성들의 해외취업 열기를 보도했으나 11월 17일 <모자라는 간호원>이라는 기획기사에서 서울대병원 등에서 간호인력의 해외 유출로 인한 인력부족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던 점에서 국내환자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세상사라는 것이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다. 가난한 조국 대한민국의 여성들에게 독일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나라였다. 높은 임금, 새로운 도전, 가족을 부양할 기회가 독일을 향한 선택을 하게했다. 그러나 김포공항을 떠난 그 젊은 여성들이 훗날 대한민국 산업화의 마중물로 역사적인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당시 판단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기대와 우려를 딛고 파독광부와 파독간호사가 산업전사로서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헌신을 했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오늘날 격찬하기에 조금도 망설일 이유가 없다.
한국 간호사들의 파독의 역사는 크게 3단계로 구분해볼 수 있다. 제1단계는 1966년 이전단계로써 종교단체 등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간호사들이 취업되었다. 제2단계는 민간인 차원에서 대규모 파독이 시작됐다. 그리고 1969년부터 1976년까지는 정부차원에서 대규모 파견이 이루어진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처럼 1960년대 초 민간 차원에서 시작된 해외취업의 효시인 파독간호사는 파독광부와 함께 한국의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발전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1966년부터 집단으로 독일 취업이 가능했으며, 1969년부터는 정부의 인력수출정책과 맞물려 <한독간호협정>에 체결되어 정부차원으로 전환하여 1976년까지 이어졌다.
우리 간호사의 독일 취업파견은 여성전문인력의 최초의 집단 해외취업으로 이역만리 독일과 한국 사이의 외교증진에도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그리고 간호사들의 독일 취업은 한국여성사에 있어서도 국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간호사들이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독일 마르크화를 벌어서 외화부족으로 경제적 여력이 없었던 가난했던 조국을 위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간호사들의 가정도 가난을 벗고 윤택한 경제적 안정을 획득했다. 결국 간호사들이 젊은 날 흘린 땀과 눈물이 가정과 나라를 살려낸 자랑스런 도전이 되었다. 특별히 독일사회에서 한국 간호사들이 신뢰와 존중과 사랑을 받은 데에는 한국인 특유의 정과 배려의 문화를 통해 독일인 의료진과 환자들의 감동이 전해지면서 독일사회에서 ‘코리안 엔젤’로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인정은 가난한 후진국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변화와 한국의 문화예술에 대한 독일사회의 관심과 연구를 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독일 신문보도의 공통적인 내용에는 “한국 젊은 여성의 친절과 상냥한 미소”는 항상 빠지지않고 들어있었다. 한 독일인 간호원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한국 간호원에 대한 경이로운 감동을 말하고 있다. “우리 또한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지만 가끔씩 힘들 때는 스트레스와 화를 다스리기 힘들다. 그러나 한국 간호원들은 늘 친절하고 웃는 얼굴이다. 아마 이 사람들은 감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고 격찬을 했다. 특히 독일인 환자들이 비록 독일어가 서툴러서 실수도 하지만 진심으로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다시 최선을 다하는 진정성에 다른 외국간호원보다도 한국 간호원의 인기와 선호도가 대단했다고 한다. 한국인에게는 인성적으로 인정이 많은 민족성이 있기 때문에 환자들의 각종 불만과 불평을 친절하게 듣고 해결해주고자 동병상린(同病相燐)의 공감으로 보살펴준 것이 감동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한국 간호원이 근무했던 ‘홱스트(Hoechst)’병원에서는 한국인 직원을 위한 메뉴를 준비해서 식사를 하게했다고 한다. 독일요리사는 인터뷰에서 “한국 간호원들이 우리에게 베푸는 친절과 배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니 참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후 1년이 지난 홱스트병원에서는 ‘한국의 밤’을 개최하여 배려했으며, 1967년 4월 18일자 프랑크후르트 알게마인네 짜이퉁(FAZ)는 행사에서 입은 한복에 관한 설명으로 지면의 거의 절반을 할애했을 정도로 한국 간호사들에 대해 호평을 했다. 우리 젊은 간호원들의 인정많고 인내심이 강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병원의 업무수행자세는 알고보면 가정교육에서 그 뿌리를 찾는 것이 맞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그 어려운 가정생활에서 가족간에 배고프고 힘들고 불편했던 시간을 밥을 나눠먹고 서로 돕고 참으면서 가족 간 사랑으로 이겨냈던 배경에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희생하며 가족을 돌봐주시던 어머니의 사랑을 뼈에 사무치도록 배웠던 간호사들의 어린 시절에서 그와 같은 ‘코리안 엔젤’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66년 8월 14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서독 파견간호원 모집공고>에는 자격조건으로 20~30세 미혼 또는 독신녀로 간호원 자격소지자, 계약기간 3년에 월급 627마르크(157달러)라고 공고했다. 당시 환율은 1달러=272원 수준이었다는 한국은행 자료를 바탕으로 157달러는 약42,700원이다. 한국내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자료에 따른 차이가 있지만 약 7,500원으로 추정된다. 사무직의 경우 초임이 대략 5,000~7,000원 수준으로 본다면 파독간호사는 약 5.7배의 임금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1인당 국민소득이 약82달러에 불과하여 월급 157달러는 놀라운 임금수준이었다. 고국에 송금한 월급은 곧 대한민국의 대외신인도와 경제발전의 마중물이 됐고, 한국 노동자들이 세계적으로 우수한 인력으로 인정을 받아서 해외로 진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특히 독일에 진출한 간호사들은 가장 우수한 실력과 성실한 근무로 독일사회의 신화로 남아있다.
우리 간호사들은 근무가 끝나면 독일어를 공부하는데 시간을 투자했다. 기숙사에서 단어를 열심히 외운 뒤 다음날 병원에서 활용하였고, 스터디그룹도 만들어 공부하거나 폭크스호흐슐레(국민대학)을 다니기도 했다. 말이 트이자 독일문화와 풍경이 눈에 들어왔고, 비로소 독일사회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적응하려는 타국에서의 노력과 함게 가족과 고향, 조국 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향수병을 앓기도 했다. 어린 시절 놀이하던 고무줄과 공기놀이를 동료간호사들과 하면서 수다를 떨기도했고, 주말에는 한복을 꺼내 입고 시내도 다니며 한국인을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간호사들은 심한 향수병으로 힘들어했다고 한다. 20대라는 나이가 고향에서 부모형제들과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바쁜 나이인데 이역만리 독일에 와서 3교대로 밀려오는 간호사일을 해야했던 일상은 결코 쉬운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사랑과 나라사랑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향한 대한민국 간호사라는 자긍심과 명예심으로 고단했던 시절을 다 이겨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인생성공이 분명하다. 파독간호사 제60주년 기념은 간호사분들만의 60주년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민과 함께 축하하는 축제가 되어야한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파독간호사분들게 더 늦기 전에 보은(報恩)을 해야하는 시간이다.
60년전 1966년 1월 31일은 대한간호협회의 역사에서 잊혀질 수 없는 날이다. 파독 간호사 제1진 128명이 오색찬란한 한복을 입고 이역만리 독일의 푸랑크후르트공항에 도착했다. 가족을 위해, 조국을 위해,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던 대한의 딸들이었다. 이후 1976년까지 한국의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벌어들인 마르크화로 한국의 산업화에 마중물이 되었다. 파독간호사들의 성실하고 근면하며 검소한 근무자세와 독일환자에 대한 정과 사랑으로 ‘코리안 엔젤’이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파독간호사들이 간 길은 독일의 일자리였지만, 돌아온 길에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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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휘 편집위원 jjsh7864@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