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부재리’ 헌법 大원칙 무너뜨리고 김대중에 면죄부 준 1997년 사법부의 자폭
5·18 진실 잔혹사… 정치적 야합, 가짜 유공자, 계엄군 덮어씌운 ‘이간질 공작’ 정황
혈세 ‘펑펑’ 5·18 진상조사위 4년의 파행... ‘전두환 사격명령’ 결국 허구로 드러나
‘5·18 진실 찾기’ 시리즈 프롤로그

1981년 대법원은 5·18 사태를 ‘김대중 일당의 반(反)국가 무장반란’으로 최종 확정했다. 그러나 16년이 지난 1997년, 사법부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다시 심리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는 헌법상의 대원칙,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마저 스스로 무너뜨리고 전대미문의 판결 번복을 통해 김대중에게 정치적 면죄부를 안겨줬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정통성과 역사적 평가가 근본부터 비틀리기 시작한 결정적 시발점이었다.
미국이 진단한 5·18의 본질은 명료했다. △북한 민간 공작대원들(North Korean Agents) △김대중 추종자들(Kim Daejung followers·Associates) △공산주의 선동가들(communist instigators) △불순세력(impure elements) 등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내란(insurrection)’ ‘반란(rebellion)’ 형태의 대남 공작으로 명확하게 파악했다.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군·경의 총기를 빼앗아 군인에 대응한 민간인은 ‘Another Enemy(또 다른 적)’로 간주해야 마땅하며 정규군의 즉각적인 소탕 대상”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1981년 1월23일 선고된 대법원 최종 판결문(80도2756)에 기록된 ‘5·18’의 실체는 피고인 김대중에 의한 의도적인 배후 공작이었다. 1·2·3심 법정이 일관되게 규명한 사실관계에 따르면 국민연합 공동의장 김대중은 5·18 유혈 사태가 발발하기 불과 이틀 전 시국선언을 통해 불을 붙였다. 국가 최고통수권자인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함과 동시에 전국의 군경과 공무원들을 향해 “정부 명령에 복종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법원은 이를 국가기능을 마비시키고 내란을 도모한 결정적 증거로 판단했고, 그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이라는 엄중한 단죄를 내렸다.
국가 공공조직의 불복종을 선동한 행위는 국가 체제를 위협한 명백한 반란이었으며, 이는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배후 조종자 김대중 체포라는 엄중한 공권력 발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민주화를 자처한 세력의 시각은 달랐다. 이들은 국가 안보를 위한 계엄 확대를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로 몰아가며 선동의 동력으로 삼았다. 대한민국 헌정사를 둘러싼 역사적 진실과 정치적 선동이 정면으로 충돌한 비극의 분기점이었다.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1980년 5·18 발생 일주일 전인 5월11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월남식으로 국민 속에 침투해 도시게릴라 농촌게릴라전을 하라”는 대중 선동 문구로 열변을 토해냈다. [발언 영상 캡처]
한민통의 종북적 실체와 전위 내각… 1981년 大法 “김대중 배후 조종 내란” 확정 판결
사법부의 판단은 단호했고 타협이 없었다. 대법원은 “국가 변란이나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었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한 피고인 김대중의 변명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나아가 판결문은 김대중이 의장으로 있던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의 종북적 실체를 차갑게 파헤쳤다. 법원은 한민통을 “북괴와 조총련의 지령에 의해 결성되고 이들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임무를 수행해 온 반(反) 국가단체”라고 명시하며 그 이적성(利敵性)을 명확히 단죄했던 것이다.
판결문이 파헤친 실체는 가공할 만했다. 1980년 9월 선고된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1심 판결문(80보군형공 38호)에 명시된 진실은 차가웠다. 피고인 김대중은 이미 광주 사태의 유혈 폭동이 터지기도 전에 그 파국이 국가 전복으로 결말날 것임을 미리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나아가 국가 권력을 접수하고 들어서서 ‘혁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전위 내각까지 사전에 치밀하게 조직했다. 이 같은 법원의 냉엄한 사실 인정과 법적 단죄는 2심 고등군법회의를 거쳐 대한민국 최고법원인 대법원 3심 확정 판결에 이르기까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유지됐다. 5·18이 국가 전복이라는 사법적 기록은 명확했던 것이다.
비상계엄 선포를 무조건적인 불법으로 몰아가던 세력의 주장도 법정의 냉엄한 논리 앞에서 일거에 무너졌다. 당시 대법원은 고도의 정치·군사적 통치 행위로서의 계엄 선포가 지닌 법률적 무게를 명확히 판시했다. 헌법적 탈선이 명백하지 않은 이상 비상계엄은 당연무효가 될 수 없으며, 국가 혼란 속에서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자 내린 계엄사령관의 사태 수습 조치 또한 법적 하자가 없는 정당한 국가권력의 행사였다고 규정했다.
법정 최고형을 앞둔 순간, 김대중이 선택한 것은 구명(救命)을 위한 굴복이었다. 그는 1981년 1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제출한 탄원서를 통해 안보를 흔든 과오를 스스로 인정했고 정계 은퇴를 약속하며 목숨을 걸어 선처를 탄원했다. 최고통수권자였던 전두환 대통령의 반응은 화합이었다. 그는 사형수 김대중과 내란 관련자들을 향해 대규모 석방이라는 포용의 칼을 빼 들었다. 비극의 상흔을 안은 채 국가적 대화합을 이루고자 폭동의 배후를 캐묻는 법적·정치적 추궁을 멈추기로 결단했다.
6공 비자금 파문과 3당 합당… 정치권 기득권 카르텔이 방조한 5·18의 정치세력화
법적 단죄를 받았던 ‘무장반란’의 실체는 거대 정치 야합의 그늘 속에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노태우의 6공 비자금 파문이 발단이었다. 정국을 뒤흔든 비자금 사태로 신한국당과 정치권이 궁지에 몰리자, 권력의 생존 계산과 야당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유례없는 야합의 서사 구도가 형성됐다. 사법부가 엄숙히 확정했던 김대중의 반국가 무장반란 혐의는 바로 이 정치적 거래와 맞물려 슬그머니 ‘민주화운동’으로 탈바꿈돼 갔다.
1990년 3당 합당이 불러온 운동권의 보수 침투와 이어진 여야 기득권 카르텔은 5·18 성역화를 방조하기에 이르렀다. 권력을 쥔 정치적 동맹이 선택한 길은 5·18의 철저한 정치 세력화였다. 5·18기념재단과 광주광역시가 주도한 가짜 유공자 양산과 무장폭동의 실체를 주도면밀하게 은폐하고 묵인했다.
‘인우보증(隣友保証)’은 가짜 5·18 유공자를 무더기로 쏟아낸 결정적 독소 조항이자 비리의 온상이었다. 주변인의 증언 몇 마디로 유공자 자격을 쥐여주는 허술한 법의 틈새를 타 브로커들이 독버섯처럼 기생했다. 한 브로커는 “유공자로 만들어 줄 테니 보상금 3억 원을 받으면 그중 일부를 달라”며 노골적으로 알선 소개비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요한 전 국민의힘 혁신위원장 역시 이 같은 음습한 은밀한 제의를 받았으나 단칼에 거절하며 유공자 양산 뒤에 숨은 기괴한 거래의 실체를 단적으로 증언했다.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외면한 독단적 프레임이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사이 5·18의 본질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핵심적 진실 규명은 철저히 매장당했다. 사태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재규정할 북한군 개입 여부와 그 실체에 대한 규명 시도는, 이른바 민주화세력의 성역화 공세 앞에 맥없이 묵살되고 외면받았다. 역사적 진실을 파헤치려는 어떠한 학술적·법적 질문조차 ‘민주화’라는 거대한 성역의 그늘에 가려 입이 봉쇄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현실이 이어졌다.

1980년 5월21일 오전 8시10분 발생한 ‘군분교 20사단 지휘차량 피탈’ 사건은 군 전술에 능한 세력이 개입한 고도의 차단 작전이자 5·18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군사적 변곡점이었다. 계엄군의 이동 계획을 사전 입수해 도로를 절개하고 통나무와 폐타이어 등 고난도 장애물로 군분교 길목 3곳을 차단한 뒤 매복하고 있다가 정규군을 습격해 혼비백산케 하고 차량·무전기·총기·장교용 우의 등을 탈취한 데다 훔친 차들을 몰고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진입하는 등 정규군을 능가하는 월등한 군사력을 보였다. 이는 계엄군 사상자가 나온 20일 3공수여단 5개 대대를 광주 기차역에서 포위하고 차량 돌진 공격을 강행한 사건과 맞물려 20사단 병력 1만3000명의 광주 진입을 막기 위한 육로와 철로 봉쇄 전략으로 분석됐다. 일반 시민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군사전술이 적용됐다는 것이다.
군부대 습격·무기 강탈·북한 호출부호 감청… “우발적 소요 아닌 고도의 정규군 수준 작전”
대한민국 군복으로 위장한 북한 무장공비와 침투 간첩들이 무고한 광주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그 참혹한 피의 대가를 계엄군에게 뒤집어씌운 ‘음습한 모략전술’. 이 공작의 실체가 명명백백히 세상에 규명된다면 파장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공권력의 폭력에 맞선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라는 신성불가침의 명분과 도덕적 정당성은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그들이 전파해 온 성역화된 민주화 담론 역시 진실의 빛 앞에 일거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 거창하게 닻을 올린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4년은 혈세 낭비와 진실 봉쇄의 시간과도 같았다. 막대한 정부 예산을 쏟아붓고도 사태의 핵심 의제인 ‘북한군 개입 및 공작 의혹’ 조사를 고의로 축소하고 방치해 온 정황이 취재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심지어 장관급인 송선태 위원장 본인이 5·18 유공자 신분인 데다 방송국과 무기고·공공기관 타격, 죽창 동원, 다이너마이트 폭파 등 섬뜩한 대(對)정부 무장폭동 계획을 기록한 이른바 ‘자유노트’의 작성자라는 충격적인 사실도 드러났다. 셀프 조사와 성역화 뒤에 진실을 가둬두려 했지만, 미 정보당국자들의 냉엄한 판단과 5·18 진실 찾기 보도 과정에서 확보된 증언들은 가려진 진실의 덮개를 집요하게 열어젖혔고 국가 안보의 가장 위험했던 순간을 증언하는 비밀의 문을 다시 열었다.
전직 군 정보 관계자가 증언한 안기부·정보사의 투항자와 귀순자에 대한 합동신문 보고서의 실체는 가공할 만했다. 1980년 5월을 전후한 한 달간 광주에서 북한을 향해 발송된 교신 신호만 5000회를 상회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당시 경찰 감청망에 무더기로 포착된 북한 특유의 호출부호들은 5·18의 그늘 뒤에서 적대 세력의 공작망이 얼마나 집요하게 작동했는지를 웅변하는 엄연한 안보적 진실로서 연구 가치가 있다. 당시 광주교도소 습격과 해방을 지시한 북한의 교신 지령을 우리 군이 감청했다는 증언은 단순한 소요 사태를 넘어선 대남 공작의 실체에 대한 재조사 논의를 이끌었다. 사태의 본질을 뒤흔들 일련의 결정적 증언 앞에서도 십수 년간 편향된 인사들이 독점하며 진실을 왜곡해 온 정부 조사기구들은 진실을 외면하기에 급급했다.
‘도청 앞 집단발포’라는 선동적 서사의 허구가 의·과학적 분석 앞에 흔들렸다. 5·18의 상징이 된 ‘꼬마상주’의 아버지 조사천 씨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계엄군의 정면 사격이 아닌 옥상 위 정체불명의 괴한이 쏜 총탄이었으며, 이마에 정확히 관통당해 숨진 임신부 최미애 씨 사망 지점에 계엄군은 배치조차 되지 않았다. 시민들의 적개심을 광적으로 자극하기 위해 정체불명의 세력이 감행한 ‘이간질 살상 공작’의 음습한 냄새가 짙게 풍겼던 치명적 정황이다.

중앙일보 이창성 기자가 촬영한 김군의 모습. 5·18조사위는 김군이 1980년 5월 기관총 사진 속 ‘광수 1번 김군’이라고 지목했다.
‘진상규명 불가’로 끝난 전두환 사격명령설… 감정적 악마화와 정치적 흑색선전의 종말
계엄군이 집단발포했다는 시점 이전에 화순경찰서 유치장에 800명이 들이닥쳐 유치인을 빼내고 총기를 강탈했다는 정부 문건들이 역설적이게도 문재인이 만든 5·18조사위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무등산 증심사 인근에선 정체불명의 ‘어깨부대’ 100여 명이 출몰했다. 계엄군의 감시망에 포착된 이 집단의 정체는 대남 공작조의 개입을 가리키는 강력한 심증을 낳았다. 무기고를 습격한 폭도들이 북한 말씨를 썼다는 간접 증언이 청취되면서 5·18 이면에 북한 공작조가 암약했음을 시사하는 뼈아픈 안보적 징후도 포착됐다.
‘군분교 습격’ 사건의 본질을 파헤친 전·현직 군사 전문가들의 진단은 충격적이다. 이것은 우발적 소요가 아닌 철저히 계산된 정규군 수준의 고도의 군사작전이었다. 당시 우리 정보당국이 북한 공작조의 서해안 침투 첩보를 포착하고 군에 즉각 전파했던 정황까지 속속 드러났다. 유언비어처럼 나돌던 ‘연고대생 500명 가세설’ 역시 진원지가 다름 아닌 북한 대남 방송이었다는 전직 정보당국자의 실증적 증언이 접수됐다.
선동으로 쌓아 올린 ‘전두환 사격 명령설’이라는 사상누각은 정부 조사기관의 최종 보고서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5·18조사위가 다룬 21개 핵심 직권조사 과제 중 가장 치열했던 발포 책임 과제가 ‘진상규명 불가’라는 결론으로 결국 막을 내렸다. 자칭 민주화세력이 증거 하나 없이 부르짖던 ‘전두환 사격명령’은 단 한 점의 물증조차 제시되지 않은 정치적 흑색선전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역사적 사실이 아닌 감정적 ‘악마화’로 안보 진영을 공격해 온 그들의 선전선동이 얼마나 허황된 정치적 공작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실증적 증거였다.
[목숨을 구걸했던 김대중의 옥중 사과문] 
전두환 대통령 각하
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인은 교도소 재소생활이 2년반에 이르렀사온대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변형과 이명 등으로 고초를 겪고 있읍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출국 허가만 해주신다면 미국에서 2-3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허가 하여주시면 감사천만이겠읍니다. 아울러 말씀 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
1982년 12월 13일 김대중 |
허겸 기자
출처 : 한미일보
‘5·18 진실 찾기’ 시리즈 프롤로그
1981년 대법원은 5·18 사태를 ‘김대중 일당의 반(反)국가 무장반란’으로 최종 확정했다. 그러나 16년이 지난 1997년, 사법부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다시 심리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는 헌법상의 대원칙,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마저 스스로 무너뜨리고 전대미문의 판결 번복을 통해 김대중에게 정치적 면죄부를 안겨줬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정통성과 역사적 평가가 근본부터 비틀리기 시작한 결정적 시발점이었다.
미국이 진단한 5·18의 본질은 명료했다. △북한 민간 공작대원들(North Korean Agents) △김대중 추종자들(Kim Daejung followers·Associates) △공산주의 선동가들(communist instigators) △불순세력(impure elements) 등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내란(insurrection)’ ‘반란(rebellion)’ 형태의 대남 공작으로 명확하게 파악했다.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군·경의 총기를 빼앗아 군인에 대응한 민간인은 ‘Another Enemy(또 다른 적)’로 간주해야 마땅하며 정규군의 즉각적인 소탕 대상”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1981년 1월23일 선고된 대법원 최종 판결문(80도2756)에 기록된 ‘5·18’의 실체는 피고인 김대중에 의한 의도적인 배후 공작이었다. 1·2·3심 법정이 일관되게 규명한 사실관계에 따르면 국민연합 공동의장 김대중은 5·18 유혈 사태가 발발하기 불과 이틀 전 시국선언을 통해 불을 붙였다. 국가 최고통수권자인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함과 동시에 전국의 군경과 공무원들을 향해 “정부 명령에 복종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법원은 이를 국가기능을 마비시키고 내란을 도모한 결정적 증거로 판단했고, 그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이라는 엄중한 단죄를 내렸다.
국가 공공조직의 불복종을 선동한 행위는 국가 체제를 위협한 명백한 반란이었으며, 이는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배후 조종자 김대중 체포라는 엄중한 공권력 발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민주화를 자처한 세력의 시각은 달랐다. 이들은 국가 안보를 위한 계엄 확대를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로 몰아가며 선동의 동력으로 삼았다. 대한민국 헌정사를 둘러싼 역사적 진실과 정치적 선동이 정면으로 충돌한 비극의 분기점이었다.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1980년 5·18 발생 일주일 전인 5월11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월남식으로 국민 속에 침투해 도시게릴라 농촌게릴라전을 하라”는 대중 선동 문구로 열변을 토해냈다. [발언 영상 캡처]
한민통의 종북적 실체와 전위 내각… 1981년 大法 “김대중 배후 조종 내란” 확정 판결
사법부의 판단은 단호했고 타협이 없었다. 대법원은 “국가 변란이나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었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한 피고인 김대중의 변명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나아가 판결문은 김대중이 의장으로 있던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의 종북적 실체를 차갑게 파헤쳤다. 법원은 한민통을 “북괴와 조총련의 지령에 의해 결성되고 이들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임무를 수행해 온 반(反) 국가단체”라고 명시하며 그 이적성(利敵性)을 명확히 단죄했던 것이다.
판결문이 파헤친 실체는 가공할 만했다. 1980년 9월 선고된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1심 판결문(80보군형공 38호)에 명시된 진실은 차가웠다. 피고인 김대중은 이미 광주 사태의 유혈 폭동이 터지기도 전에 그 파국이 국가 전복으로 결말날 것임을 미리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나아가 국가 권력을 접수하고 들어서서 ‘혁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전위 내각까지 사전에 치밀하게 조직했다. 이 같은 법원의 냉엄한 사실 인정과 법적 단죄는 2심 고등군법회의를 거쳐 대한민국 최고법원인 대법원 3심 확정 판결에 이르기까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유지됐다. 5·18이 국가 전복이라는 사법적 기록은 명확했던 것이다.
비상계엄 선포를 무조건적인 불법으로 몰아가던 세력의 주장도 법정의 냉엄한 논리 앞에서 일거에 무너졌다. 당시 대법원은 고도의 정치·군사적 통치 행위로서의 계엄 선포가 지닌 법률적 무게를 명확히 판시했다. 헌법적 탈선이 명백하지 않은 이상 비상계엄은 당연무효가 될 수 없으며, 국가 혼란 속에서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자 내린 계엄사령관의 사태 수습 조치 또한 법적 하자가 없는 정당한 국가권력의 행사였다고 규정했다.
법정 최고형을 앞둔 순간, 김대중이 선택한 것은 구명(救命)을 위한 굴복이었다. 그는 1981년 1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제출한 탄원서를 통해 안보를 흔든 과오를 스스로 인정했고 정계 은퇴를 약속하며 목숨을 걸어 선처를 탄원했다. 최고통수권자였던 전두환 대통령의 반응은 화합이었다. 그는 사형수 김대중과 내란 관련자들을 향해 대규모 석방이라는 포용의 칼을 빼 들었다. 비극의 상흔을 안은 채 국가적 대화합을 이루고자 폭동의 배후를 캐묻는 법적·정치적 추궁을 멈추기로 결단했다.
6공 비자금 파문과 3당 합당… 정치권 기득권 카르텔이 방조한 5·18의 정치세력화
법적 단죄를 받았던 ‘무장반란’의 실체는 거대 정치 야합의 그늘 속에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노태우의 6공 비자금 파문이 발단이었다. 정국을 뒤흔든 비자금 사태로 신한국당과 정치권이 궁지에 몰리자, 권력의 생존 계산과 야당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유례없는 야합의 서사 구도가 형성됐다. 사법부가 엄숙히 확정했던 김대중의 반국가 무장반란 혐의는 바로 이 정치적 거래와 맞물려 슬그머니 ‘민주화운동’으로 탈바꿈돼 갔다.
1990년 3당 합당이 불러온 운동권의 보수 침투와 이어진 여야 기득권 카르텔은 5·18 성역화를 방조하기에 이르렀다. 권력을 쥔 정치적 동맹이 선택한 길은 5·18의 철저한 정치 세력화였다. 5·18기념재단과 광주광역시가 주도한 가짜 유공자 양산과 무장폭동의 실체를 주도면밀하게 은폐하고 묵인했다.
‘인우보증(隣友保証)’은 가짜 5·18 유공자를 무더기로 쏟아낸 결정적 독소 조항이자 비리의 온상이었다. 주변인의 증언 몇 마디로 유공자 자격을 쥐여주는 허술한 법의 틈새를 타 브로커들이 독버섯처럼 기생했다. 한 브로커는 “유공자로 만들어 줄 테니 보상금 3억 원을 받으면 그중 일부를 달라”며 노골적으로 알선 소개비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요한 전 국민의힘 혁신위원장 역시 이 같은 음습한 은밀한 제의를 받았으나 단칼에 거절하며 유공자 양산 뒤에 숨은 기괴한 거래의 실체를 단적으로 증언했다.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외면한 독단적 프레임이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사이 5·18의 본질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핵심적 진실 규명은 철저히 매장당했다. 사태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재규정할 북한군 개입 여부와 그 실체에 대한 규명 시도는, 이른바 민주화세력의 성역화 공세 앞에 맥없이 묵살되고 외면받았다. 역사적 진실을 파헤치려는 어떠한 학술적·법적 질문조차 ‘민주화’라는 거대한 성역의 그늘에 가려 입이 봉쇄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현실이 이어졌다.
1980년 5월21일 오전 8시10분 발생한 ‘군분교 20사단 지휘차량 피탈’ 사건은 군 전술에 능한 세력이 개입한 고도의 차단 작전이자 5·18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군사적 변곡점이었다. 계엄군의 이동 계획을 사전 입수해 도로를 절개하고 통나무와 폐타이어 등 고난도 장애물로 군분교 길목 3곳을 차단한 뒤 매복하고 있다가 정규군을 습격해 혼비백산케 하고 차량·무전기·총기·장교용 우의 등을 탈취한 데다 훔친 차들을 몰고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진입하는 등 정규군을 능가하는 월등한 군사력을 보였다. 이는 계엄군 사상자가 나온 20일 3공수여단 5개 대대를 광주 기차역에서 포위하고 차량 돌진 공격을 강행한 사건과 맞물려 20사단 병력 1만3000명의 광주 진입을 막기 위한 육로와 철로 봉쇄 전략으로 분석됐다. 일반 시민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군사전술이 적용됐다는 것이다.
군부대 습격·무기 강탈·북한 호출부호 감청… “우발적 소요 아닌 고도의 정규군 수준 작전”
대한민국 군복으로 위장한 북한 무장공비와 침투 간첩들이 무고한 광주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그 참혹한 피의 대가를 계엄군에게 뒤집어씌운 ‘음습한 모략전술’. 이 공작의 실체가 명명백백히 세상에 규명된다면 파장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공권력의 폭력에 맞선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라는 신성불가침의 명분과 도덕적 정당성은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그들이 전파해 온 성역화된 민주화 담론 역시 진실의 빛 앞에 일거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 거창하게 닻을 올린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4년은 혈세 낭비와 진실 봉쇄의 시간과도 같았다. 막대한 정부 예산을 쏟아붓고도 사태의 핵심 의제인 ‘북한군 개입 및 공작 의혹’ 조사를 고의로 축소하고 방치해 온 정황이 취재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심지어 장관급인 송선태 위원장 본인이 5·18 유공자 신분인 데다 방송국과 무기고·공공기관 타격, 죽창 동원, 다이너마이트 폭파 등 섬뜩한 대(對)정부 무장폭동 계획을 기록한 이른바 ‘자유노트’의 작성자라는 충격적인 사실도 드러났다. 셀프 조사와 성역화 뒤에 진실을 가둬두려 했지만, 미 정보당국자들의 냉엄한 판단과 5·18 진실 찾기 보도 과정에서 확보된 증언들은 가려진 진실의 덮개를 집요하게 열어젖혔고 국가 안보의 가장 위험했던 순간을 증언하는 비밀의 문을 다시 열었다.
전직 군 정보 관계자가 증언한 안기부·정보사의 투항자와 귀순자에 대한 합동신문 보고서의 실체는 가공할 만했다. 1980년 5월을 전후한 한 달간 광주에서 북한을 향해 발송된 교신 신호만 5000회를 상회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당시 경찰 감청망에 무더기로 포착된 북한 특유의 호출부호들은 5·18의 그늘 뒤에서 적대 세력의 공작망이 얼마나 집요하게 작동했는지를 웅변하는 엄연한 안보적 진실로서 연구 가치가 있다. 당시 광주교도소 습격과 해방을 지시한 북한의 교신 지령을 우리 군이 감청했다는 증언은 단순한 소요 사태를 넘어선 대남 공작의 실체에 대한 재조사 논의를 이끌었다. 사태의 본질을 뒤흔들 일련의 결정적 증언 앞에서도 십수 년간 편향된 인사들이 독점하며 진실을 왜곡해 온 정부 조사기구들은 진실을 외면하기에 급급했다.
‘도청 앞 집단발포’라는 선동적 서사의 허구가 의·과학적 분석 앞에 흔들렸다. 5·18의 상징이 된 ‘꼬마상주’의 아버지 조사천 씨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계엄군의 정면 사격이 아닌 옥상 위 정체불명의 괴한이 쏜 총탄이었으며, 이마에 정확히 관통당해 숨진 임신부 최미애 씨 사망 지점에 계엄군은 배치조차 되지 않았다. 시민들의 적개심을 광적으로 자극하기 위해 정체불명의 세력이 감행한 ‘이간질 살상 공작’의 음습한 냄새가 짙게 풍겼던 치명적 정황이다.
중앙일보 이창성 기자가 촬영한 김군의 모습. 5·18조사위는 김군이 1980년 5월 기관총 사진 속 ‘광수 1번 김군’이라고 지목했다.
‘진상규명 불가’로 끝난 전두환 사격명령설… 감정적 악마화와 정치적 흑색선전의 종말
계엄군이 집단발포했다는 시점 이전에 화순경찰서 유치장에 800명이 들이닥쳐 유치인을 빼내고 총기를 강탈했다는 정부 문건들이 역설적이게도 문재인이 만든 5·18조사위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무등산 증심사 인근에선 정체불명의 ‘어깨부대’ 100여 명이 출몰했다. 계엄군의 감시망에 포착된 이 집단의 정체는 대남 공작조의 개입을 가리키는 강력한 심증을 낳았다. 무기고를 습격한 폭도들이 북한 말씨를 썼다는 간접 증언이 청취되면서 5·18 이면에 북한 공작조가 암약했음을 시사하는 뼈아픈 안보적 징후도 포착됐다.
‘군분교 습격’ 사건의 본질을 파헤친 전·현직 군사 전문가들의 진단은 충격적이다. 이것은 우발적 소요가 아닌 철저히 계산된 정규군 수준의 고도의 군사작전이었다. 당시 우리 정보당국이 북한 공작조의 서해안 침투 첩보를 포착하고 군에 즉각 전파했던 정황까지 속속 드러났다. 유언비어처럼 나돌던 ‘연고대생 500명 가세설’ 역시 진원지가 다름 아닌 북한 대남 방송이었다는 전직 정보당국자의 실증적 증언이 접수됐다.
선동으로 쌓아 올린 ‘전두환 사격 명령설’이라는 사상누각은 정부 조사기관의 최종 보고서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5·18조사위가 다룬 21개 핵심 직권조사 과제 중 가장 치열했던 발포 책임 과제가 ‘진상규명 불가’라는 결론으로 결국 막을 내렸다. 자칭 민주화세력이 증거 하나 없이 부르짖던 ‘전두환 사격명령’은 단 한 점의 물증조차 제시되지 않은 정치적 흑색선전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역사적 사실이 아닌 감정적 ‘악마화’로 안보 진영을 공격해 온 그들의 선전선동이 얼마나 허황된 정치적 공작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실증적 증거였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인은 교도소 재소생활이 2년반에 이르렀사온대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변형과 이명 등으로 고초를 겪고 있읍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출국 허가만 해주신다면 미국에서 2-3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허가 하여주시면 감사천만이겠읍니다. 아울러 말씀 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
1982년 12월 13일 김대중
허겸 기자
출처 : 한미일보